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안 시대 (문단 편집) == [[한국사]]와의 관계 == [[한국사]]의 [[남북국시대]] 중엽에서 [[고려시대]] 중엽과 겹친다. [[한국사]]의 국왕으로 대비된다면 [[신라]] 열조 [[원성왕]]과 [[발해]] [[강왕]]의 치세에서 [[고려]] [[명종(고려)|명종]]의 치세와 겹치는 시기로 대략 400년에 달한다. 흥미로운 건 열조 원성왕 때 신라는 하대의 혼란을 추스렸고, 발해 역시 초기 혼란기에 접어든 직후 [[선왕]] 때에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다. 또 [[무신정변]]이 일어나 [[무신정권]]이 들어서는 시기도 1170년으로 [[타이라 가문]]까지 포함한 일본의 군사정권 성립과 상당히 겹친다.[* 1. [[당나라|당]] [[제국]]으로 대변되는 기존 율령제가 무너진 시대에 그 외곽에서 남북국과 헤이안 시대 초기의 일본이 번성 -> 2. 다시 율령체계가 아예 붕괴됨에 따라 빚어진 혼란기에 한국은 [[후삼국시대]], 일본에서는 셋칸시대가 무르익었으며 -> 3. [[북송]]과 [[고려]]의 번영이 시작될 때 [[중흥]]이 시작되었고 -> 4. 북송과 고려의 문벌체제가 다시 망하는 정권교체기에 헤이안 시대 역시 끝났다고 보면 대강 시대적 맥락이 맞는다.] 흔히 한국에서는 백제와 일본이 친했고 신라는 일본과 사이가 나빴다고 알려져 있지만, [[통일신라]]는 백제만큼은 아니라도 [[아스카 시대]], [[나라 시대]] 내내 활발하게 대규모 사절단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다.[* 국가 간의 관계는 발해와 더욱 친밀했으나 발해와 일본 사이에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국가 간의 교류는 신라와 훨씬 잦았다.] 통일신라가 무너지기 전인 9세기까지는 [[장보고]]로 대표되는 국제 사무역이 어느 정도 활발했다. 그러나 9세기 중후반 들어서 [[통일신라]] 말기가 되면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면서 [[신라구|신라 해적]]들이 일본 서부 지역을 대규모로 [[약탈]]했고, [[10세기]]에 들어서면 사무역도 감소했다. 후삼국시대에는 [[후백제]]는 일본에 옛 백제 시절 인연을 상기시키면서 적극적으로 일본에 통교 요청을 했지만 전부 [[대마도]]에서 문전박대당했다. 이후에 들어선 [[고려]]와도 건국 후 약 100여 년간 공식 교류가 거의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